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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상규 제47회 사법시험 2차합격/경북대 법대 졸/동아대 대학원 재학 

 

 

 

 

 

 

1. 들어가며

 


무능력자의 변명을 지금부터 늘어놓을까 합니다. 어떻게 어디서부터 이야기해야 할지…


이 짧은 글로 얼마나 많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을지…  엄두가 나지 않습니다.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들이 나의 능력으

 

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으로 이 시간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돌이켜 보면 이 계절은 나에게 참으로 잔인

 

했었는데, 10년의 기다림 끝에 푸근하고 외롭지 않은 가을을 맞이하게 되었습니다.

 

 

 

 

2. 가 난

 

 

 


난 중학교 2학년 때까지 다락방에서 살았다. 동래 고등학교 정문 앞에서 분식집을 했던 우리 집은 점포에 딸린 자그마한 방 한 칸

 

에 다락방이 전부였다. 앵글로 짠 사다리로 오르내리고 무릎으로 서면 머리가 닿았던 그 작은 공간에서 나의 꿈이 영글어갔다. 남

 

들은 핫도그를 좋아할지 모르지만 난 유독 핫도그가 싫다. 항상 엄마에게선 그라탕유 냄새가 났고 그 냄새가 어린 마음에 너무 싫

 

었다. 콩국, 국밥, 오뎅 찜통을 들어 나르고 핫도그 쏘세지에 나무젓가락을 꽂으며 어머니를 돕는 게 나의 여가 생활이었고, 항상

 

동래고등학교 축구부 형들이랑 라면을 먹으며 씩씩하게 자랐다.

 

 


학교를 다녀온 화창한 토요일 오후였다. 방에서 손님들이 앉아서 술도 마시고, 화투놀이도 즐기다가, 마무리를 지을 때쯤이었나

 

보다. ‘여기는 우리 가족들이 사는 방인데’라는 생각에 화가 났다. 그래서 어머니께 내가 화가 났음을 보였다. 그리고 뛰쳐나와 골

 

목길로 접어드는 순간 눈물이 콸콸 쏟아졌다. 내 신세가 처량해서가 아니었다. 내가 화내고 나오는 뒤통수로 애타게 들리던 어머

 

니의 부름 때문이었다.  어머니가 마음 아파 하실까봐 너무 너무 미안해서 눈물이 났다.

 

 

 


어버이날 어머니께 썼던 편지들의 주제는 항상 동일했다. ‘가난하지만 우리 집은 행복하다’고. 내가 책상을 처음 가진 것도 중3 때

 

였다. 그 전에는 형의 다락방 앉은뱅이 책상을 빌려 쓰거나 밥상을 펴서 공부를 하였다. 중학교에서 매 시험마다 90점을 넘긴 학생

 

에게 우등상을 주곤 했는데 그걸 받아 오는 게 나의 삶의 목적이었다. 당연히 그 당시에 학원은 엄두도 못 내고 그저 혼자서 공부

 

하거나 근처 공공도서관을 이용해야했다. 그 뒤로도 고등학교 졸업 때 까지 과외는커녕 단과학원도 마음껏 다닐 수 있는 상황은

 

아니었다. 우등상은 어머니 삶의 활력소였고 나도 그걸 알고 있었다. 그래서 우등상만은 꼭 받아왔고 어머니께서는 차곡차곡 잘

 

모아두셨다.

 

 

 

 

3. 어머니

 

 

 


사랑은 의리이고, 의리는 믿음을 지키는 것이다. 나는 어머니의 사랑에 의리를 지키기 위해서 최선을 다해서 살아온 것 같다. 어머

 

니는 가난하지만, 열심히 사셨다. 우유배달영업소에서 방 한 칸을 빌려 형과 내가 거처를 삼았고, 어머니께서는 새벽같이 우유차

 

가 오면 우유를 나르고 배달을 하러 나가셨다. 동래고등학교 앞에서 자리를 잡고 분식점을 시작하면서 그곳에 터전을 마련하기 시

 

작했고 나의 유년기, 청소년기도 거기서 보내게 되었다. 핫도그, 라면, 팥빙수 등을 팔았고 동래고등학교에서 주문이 있는 날이면,

 

콩국, 국밥, 오뎅도 팔았다.

 

 

 

 

그 이후로도 어머니는 호텔주방일, 백화점일부터 별별 험한 일들까지 안 해 보신 일이 없으실 정도였고, 내가 고시 준비한다고 서

 

울로 간 다음부터는 보험 설계사 일도 하셨다. 내가 합격한 지금도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성치 않은 다리를 이끌고, 유선방송 수금

 

일을 하러 다니신다. 부모가 그런 고생을 하고 계시니 철이 일찍 들 수밖에 없었다. 어머니가 실망하실 만한 일은 일절하지 않았

 

다. 지금까지 담배를 피우지 않는 것도 순전히 어머니의 염려 덕분이다.

 

 

 


고등학교 2학년말 딱 지금처럼 가을 찬바람이 불 때였다. 어머니께서 위암 선고를 받으셨다. 어리둥절했고 막연히 그냥 괜찮을 거

 

라는 생각만 했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우등상으로도 해결할 수 없는 상황에 처한 것이었다. 동아대학 병원에

 

서 수술을 마친 어머니를 뵈러 갔다. 중환자실에 누워서 가쁜 숨을 쉬고 있는 어머니를 보게 되었다. 항상 내게는 무쇠팔 무쇠다리

 

였던 어머니였고, 어머니만 옆에 있으면 아무 것도 무섭지 않았는데…. 너무너무 불쌍한 어머니 모습을 보고 말았다. 도저히 그 모

 

습을 볼 수가 없어 화장실로 달려가 서럽도록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그날 이후로 나에게는 기댈 수 있는 어머니는 사라졌고, 내가 책임지고 보살펴야 할 어머니만 남게 되었다. 한 가지 굳은

 

다짐을 했다. 내가 저 불쌍한 어머니를 위해 최선을 다해 살겠다고…. 그리고 고2 말부터 극도의 노이로제에 시달리면서 불합격으

 

로 얼룩진 10년간의 나의 시험 인생이 시작되었다.

 

 

 

 

 

4. 나의 재수생활과 고시 입문

 


 

죽어라 해도 안 되는 것들이 있었다. 나에겐 수능 입시가 그것이었다. 고3 수능을 멍하게 치고 나와서 문과로 바꾸고 재수를 시작

 

하였다. 집 근처에 새로 생긴 학원이었다. 내 인생은 여기서 두 사람을 만나면서 완전한 전환점을 맞게 되었다.

 


중학교 때부터 난 남자가 세상에 나서 세 가지만 가질 수 있으면 성공한 삶이라는 생각을 하였다. 나의 일, 내가 목숨 걸고 지켜야

 

할 한 여자, 나와 사상을 같이하는 친구. 그런데 재수 생활을 하면서 그것들을 가지게 되었다. 경찰대학교를 2차까지 합격하고 있

 

었고, 첫사랑을 만났고, 손종수라는 스승이자 친구를 만난 것이다. 하지만 첫사랑을 만난 대가로 수능 성적이 저조했고, 경찰대에

 

최종 낙방하였다. 그래도 나에겐 두 사람이 있어 행복했다. 그것도 잠시였다. 대학교 1학년 여름방학을 마칠 때쯤 나에게 죽을 만

 

큼 슬픈 가을이 찾아오고 있었다. 잠시 미국에 갔다 온 첫사랑은 나에게 집안의 가난함과 나의 무능함을 이유로 들고 나를 떠나 다

 

른 남자를 만났고, 어머니는 관절염으로 병원에 다시 들어가셨고, 나는 고시 공부한다고 모든 것이 피폐해져 갔다.

 

 

 


종합병원 원장 딸인 그녀는 처음부터 나와는 맞지 않았던 것 같다, 하지만 중간에 항상 종수형이 있었고, 형은 나에게 마음 공부하

 

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첫사랑도 떠나고, 종수 형만이 내 곁에 있었지만, 종수 형마저 2001년 2월 만성신부전으로 1년 동안 투

 

병생활을 하다 세상을 떠나게 되었다. 나를 가장 슬프게 하는 것은 항상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이었다. 태어나서 그렇게 많이

 

울어본 적이 없었던 것 같다. 형을 밀양의 이름도 모르는 산에 뿌리고 난 뒤에, 서울대학교 교환학생으로 서울 생활을 시작하게 되

 

었다. 그리고 꿈에도 그리던 첫 1차 합격을 2002년도에 하게 되었다.

 

 

 

 

 

5. 실패와 좌절

 

 

 


대학교 2학년을 마치고 99년 1차 시험을 시작으로 00년, 01년 연속 세 번을 낙방하고 02년도 44회 시험에 네 번 만에 겨우 1차 합격

 

을 했다. 하지만 기쁨도 잠시였고 45회 2차에서 과락으로 떨어지면서 46회는 토익 때문에 시험장에도 들어가 보지 못하는 수모를

 

겪어야 했다. 2004년도에 모든 것을 정리하고 완전히 새롭게 시작하는 마음으로 스터디 그룹도 조직하고, 동차 합격을 위해 매진

 

하여 2년을 보내고 드디어 고시인생을 마무리 지었다.

 

 

 


내 배에는 배꼽 근처에 여러 개의 화상 자욱이 있다. 사실은 시험 전에 체력이 떨어져서 나에게 남아있는 마지막 에너지까지 짜내

 

기 위해서 극약 처방으로 뜸을 뜬 것인데 살에다 바로 태우는 직접구라는 방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흉터가 많이 남은 것이다. 나의

 

실력이 시험을 당해내지 못할 정도에서 시험을 억지로 이기려고 하니 그렇게 발버둥을 친 시험은 꼭 낙방을 하게 되었다. 안 될 시

 

험 앞에서는 몸이 부서져 버렸다. 되든 안 되든 내 모든 것을 쏟아 부었고 그래서 떨어지는 시험에 후회는 없었다.

 

 

 


2003년 가을 이맘때부터 나의 인생은 또 한 번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토익이 제대로 준비가 안 된 상태에서 2차 시험에 낙방

 

한 것이었다. 부동산 영업을 마무리 짓고, 10월부터 변호사님의 도움을 받으며 토익 준비를 했지만, 발표를 기다리던 상황에서 공

 

부는 손에 잡히지 않았고, 그렇게 12월이 와 버렸다. 행정법 39.5로 나도 과락 사태에 동참하게 되었다. 낙방의 슬픔을 즐기고 있을

 

시간이 없었다. 경북대 졸업 준비를 마쳐야 했고, 12월 토익도 준비해야했다. 이미 동아대 대학원에 장학생으로 합격해 있었던 터

 

라, 졸업을 하지 못하면 대학원도 취소되고 군대에도 가야하는 머리 아픈 상황이었다.

 

 

 

 

부랴부랴 기말고사에도 참석하고 최선을 다했지만 학교에서 충격적인 통보가 왔다. 영어 과목 이수가 되지 않아서 졸업을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아니면 12월 토익이 600만 넘으면 졸업이 가능하다고 했지만 첫 시험에서 425를 받은 내가 600은 자신이 없었다.

 

사시 1차 선택과목으로 독일어만 6년 정도를 하고 나니 영어가 뭔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토익을 서울에서 보고 잠시 짐을 싸서

 

국립 경상대학교에 겨울 계절학기 3학점을 등록하고 진주로 유배 생활을 하러 갔다. 결국 4주 수업을 마치는 그날 토익점수가 620

 

이 나오는 시트콤 인생으로 전락하고 말았다. 다시 서울로 올라가 정신을 차리고 영어 공부를 하면서 스터디 팀 조직을 만들어갔

 

다. 그해 1차 시험 치는 날은 서글프게 비가 추적추적 내렸고, 남들은 1차 시험을 보러 가는데 나는 토익 시험장으로 가야만 했다.

 

다행히 그 시험에서 810점이 나와 토익은 일찍 마무리 짓고 출발할 수 있었다.

 

 

 

 

 

6. 은인들의 도움

 

 

 


난 참 인덕이 많은 놈이다. 내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것은 나 혼자 서 있는 것이 아니고, 많은 버팀목으로 서 있는 것이라는 것을

 

잘 안다.


 

 

내가 제45회 2차 시험을 치고 발표를 기다리던 때의 일이다. 낙향하지 않고 서울에서 계속 있으면서 여러 가지 아르바이트로 연명

 

을 하였다. 이런 저런 일자리를 알아봐도 집에 돈을 붙일 수 있는 정도는 벌지 못했다. 어머니께서 3년 정도 보험 설계사 일을 하셨

 

지만, 빚이 늘어나면서 일도 그만두시고, 건강도 극도로 나빠지기 시작하셨다. 한마디로 나는 이제 공부는 접어야 하는 상황이었

 

다.


 

 

 

그러면서 나의 대학 마지막 학기가 대구에서는 진행되고 있었고, 나는 그 무렵 부동산 영업에 희망을 걸고 열심히 일했다. 그래서

 

형사특별법 강의를 하시는 교수님께 사정을 말하고 낙제만은 면하고자 한번 찾아뵙기로 하였다. 교수님은 검사 출신 변호사로 개

 

업을 하고 얼마 되지 않은 상황에서 학교 강의까지 하시던 중이셨다. 변호사 사무실로 찾아가서 1차 합격증과 재직증명서 등을 보

 

여드리고 사정을 말씀 드린지 10분 정도가 흘렀다. 일면식도 없었던 나에게 메모지에 계좌 번호를 적어 달라 하셨다.

 

 

 

 

조건은 하던 일을 그만 두고 다시 공부를 하라는 것이었다. 투자할 가치가 있어 보여서 투자하는 거라는 말씀만 하셨다. 그 뒤로 2

 

년 동안 한 달에 얼마씩 해서 큰 액수의 생활비 지원을 받았다. 아마 교수님이 아니었으면 공부를 그만 두고 군대를 갔어야 했는지

 

도 모른다. 그해에 2차는 행정법 과락 사태에 휘말려 실패를 했고, 덩달아 토익도 패스하지 못하면서 내 인생에 최대의 위기를 맞

 

을 때 교수님의 도움은 그 난관을 헤쳐 나갈 수 있는 유일한 희망이었다. 교수님의 지원으로 나는 다시 일어섰고, 토익,1차,2차 단

 

한 번의 탈락도 없이 동차 합격의 꿈을 이루었다.

 

 

 

또한 1차 시험에서 형법은 하나만 틀리며 평균 90점을 넘기는 고득점도 이루었다. 석 달에 한번 정도씩 교수님께 편지를 썼다. 전

 

화로는 할 수없는 내가 처한 형편에 관한 이야기, 공부를 해나가고 있는 모습들, 나의 꿈과 이상, 그리고 투지. 많은 것들을 적어서

 

보내 드렸고 교수님은 무척 반가워 하셨다. 내가 시험에 합격하고 바로 찾아뵙겠다고 말씀드리니 당장은 기쁨을 만끽하고, 천천히

 

들리라고 하셨다. 그래서 일주일이 지나고 찾아 뵈었더니 얼굴에 환한 미소로 나를 맞으시며 “내가 사람을 잘 보긴 잘 봤지?”라는

 

말씀을 해주셨다. 그리고 저녁 식사를 사주시고 헤어질 때는 나의 손을 꼭 잡으시며 “참 훌륭하다”는 한 마디로 나의 모든 노력들

 

을 보상받을 수 있게 해주셨다.

 

 

 


대학교 1학년 여름 방학이 끝나갈 무렵 내 인생에 제일 잔인한 가을이 왔을 때 모든 걸 포기하고 군대를 가든지 돈을 벌러 갈 생각

 

이었다. 휴학계를 다 쓰고 마지막으로 사업을 하시던 영우 외삼촌께 인사를 드리러 갔다. 다른 건 신경 쓰지 말고 공부만 하라고

 

하시면서 그 때부터 외삼촌이 중국에 들어가실 때까지 여러 해 경제적인 지원이 이어졌다. 휴학은 취소되었고, 군대도 연기시키

 

고, 다시 공부에 매진하였다. 이번 합격 소식에 외삼촌은 많이 기뻐하셨고, 마을 잔치 비용으로 거액을 내놓으셨다. 삼촌께서 그

 

때 날 잡아주지 않았다면 지금쯤 내가 뭘 하고 있을지 모르겠다.

 

 

 


 

대구 곽병원에서 설립한 운경장학재단에서 장학 혜택을 3년간 받았다. 운경학숙이라는 기숙사를 공짜로 제공받은 것이었다. 학숙

 

에서 많은 의대 형들과 보냈던 시간들은 잊을 수 없는 추억이다. 또한 내가 서울에서 고시 공부로 몸이 고장이 나면 항상 무료로

 

치료해 주셨던 나의 주치의 백두한의원 이재철 원장님도 여기 학숙에서 같은 방을 쓴 인연으로 지금까지 물심양면으로 나를 도와

 

주신 은인이다. 학숙은 나의 유일한 대구 생활의 터전이었다. 암흑같이 힘들었던 대구 생활을 아르바이트 한번 하지 않고 공부에

 

만 매진할 수 있도록 버티게 해준 것은 학교장학금과 운경학숙 그리고 삼촌의 도움이었다.

 

 

 

7. 합격 후기

 

 

 


동아대에서 사법시험 공부방법론으로 2시간 특강을 했다. 사람들 앞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생각들을 전한다는 것은 짜릿한 일이

 

다. 그 특강에 참석한 인연으로 지금은 스터디팀을 하나 맡아서 관리를 하고 있다. 담당 교수님인 이점인 변호사님을 중심으로 중

 

견 법조인으로 계시는 교수님들과 저녁을 먹으며 법조 선배님들의 살아 있는 법조 생활에 관해 많은 이야기와 조언들도 들을 수

 

있는 기회도 가졌다.

 

 

 


동해중학교에 가서는 학교 방송에 나와서 후배들에게 인사말을 전할 수 있는 영광을 누렸다. 후배들은 나를 연예인 대접을 해주었

 

다. 악수하는 것도 무척이나 좋아했고, 싸인도 받아갔다. 학교 밖에서도 알아봐 주고 참 고마웠다. 브니엘고등학교를 방문했을 때

 

는 네 번 정도 반에 들어가서 학생들에게 인사를 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졌다.  고등학생들의 생기 넘치고 장난기 어린 눈빛은 잊

 

을 수가 없다. 그리고 총동창회에서 달아주신 파란색 플래카드 덕분인지 인기를 실감할 수 있었다.

 

 

 


남해 외가에 가서 잔치를 했는데 마을이 생기고는 처음 있는 일이라고 했다. 어르신들께 인사를 전하고 술을 권하며 즐거운 한때

 

를 보냈다. 김두관 전 장관의 축전과 박희태 국회 부의장의 축전을 받고 남해 신문에도 이름이 났다.

 

 


어머니께서 다니시던 절에 떡이며 과일을 준비해서 가시면 수능 철이라 수험생 어머니들이 어머니 손 한번 잡아 보려고 줄을 섰

 

고, 수험생 자식들에게 꼭 먹여야 한다고 너도 나도 떡을 받아갔다. 어머니의 병환은 벌써 이런 시간을 지내는 동안 다 나아 버리

 

셨는지 요즘은 아프시다는 말씀도 없으시다.

 

 

 

 

 

 

 


저는 이제야 세상에 첫걸음을 내딛었습니다.

 

인생을 살면서 수많은 좌절과 실패들 그러나 그 속에서 항상 나를 지탱해주던 분들이 계셨기에 제가 현재 이 글을 쓰고 있습니다,

 

이 글을 읽으시는 많은 분들 또한 앞으로 수많은 곤경과 역경에 처하게 될것입니다.

 

 

그러나 거기에 휘말려 모든것을 내려 놓지마시고 한발만 앞으로 나아가세요

 

그 한발을 통해 좌절이 행복으로 역경이 행운으로 돌아올것입니다.

 

중요한것은 자기자신을 믿는것입니다. 많은 고난이 여러분을 찾아오더라도 자신을 믿는다면 반드시 극복할 수 있습니다.

 

저를 지도해 주시고 이끌어주신 많은 분들에게 부끄럽지 않도록 훌륭한 법조인이 되기 위해 최선을 다해 살 것을 다짐해 봅니다.

 

긴 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
    Soliloquy 2021.03.04 21:53
    저는 당신의 이 한 문장에 인성을 인정합니다.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들이 나의 능력으
    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으로 이 시간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어떤 일을 하든... 초심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 ?
    고전이어폰 2021.03.04 22:26
    @하..
    요즘은 장문의 글을 읽는게 힘든분들이 많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 ?
    하.. 2021.03.04 21:03
    가난하게 공부하기 힘들었습니다..인거같은데
  • ?
    고전이어폰 2021.03.04 22:26
    @하..
    요즘은 장문의 글을 읽는게 힘든분들이 많이 보이는것 같습니다....
  • ?
    하.. 2021.03.04 22:43
    @고전이어폰
    실질적으로 물적 지원이 충분할 때 고시 합격하였고 본문 중에서도 주변 도움으로 합격할 수 있었다고 글쓴이도 밝혔음에 개인적인 생각을 댓글로 적은 것.

    좋은 글귀는 장문이라도 술술 읽히는데 안 읽는 사람이 아쉬울 거라 생각합니다.
  • ?
    Soliloquy 2021.03.04 21:53
    저는 당신의 이 한 문장에 인성을 인정합니다.
    " 지금 와서 생각해 보면 많은 부분들이 나의 능력으
    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주변의 도움으로 이 시간이 존재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향후 어떤 일을 하든... 초심을 잃지 마시길 바랍니다.
  • ?
    Dio 2021.03.05 10:36
    정말 대단한 분이시다.
    배에 화상자국이 생긴 이야기는 얼마나 노력 했는지 알 수 있는 부분이네
    난 살면서 글쓴이만큼 노력 해보지 않았지만 얼마나 대다한 사람인지 느낄 수 있는 글이네
  • ?
    88 2021.03.18 09:02
    사실 공부가 젤 힘든거 맞음ㅋㅋㅋ
    여러가지가 있지만, 열심히 해도 보답받지 못할수 있다는 두려움까지 있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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